좌석버스에서 느낀 여성 쇼핑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좌석버스에서 느낀 여성 쇼핑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

Posted at 2011.02.27 18:01 | Posted in 영국★한국 사회
지난 토요일 밤 서울역에서 분당으로 오는 길이었다. 역시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도 많았고, 내가 버스에 타고 나니 명동을 지나기가 무섭게 버스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자리가 없어 이미 두 사람은 손잡이를 잡고 문 근처에서 섰다.

나는 눈을 붙이기에 가장 좋은 맨 뒷자리 창문쪽에 앉아 슬슬 한숨 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남산 터널 통과하기 바로 전 정류장에서 한 아리따운 젊은 여성분이 손에 이것저것 들고 타는 것이었다. 그녀가 든 쇼핑백에는 큼지막한 메이커 혹은 브랜드 이름이 적혔고, 그 브랜드에 가장 어울림직한 색깔로 치장되어 패션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무거워 보이고 심지어 밤 늦은 시각 만원 버스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는 부피가 큰 쇼핑백을 세 개나 들고 간신히 버스 카드를 찍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하이힐의 딱딱거리는 소리는 어느새 나의 잠 귀신을 저멀리 쫓아버렸다.

대신, 나는 어느새 뒷 편에 엉거주춤 서 있는 그녀를 보며, 왜 이런 짓(?)을 했을까 나름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여성들이 쇼핑을 좋아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 혹은 이 기정화된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내가 사귀던 혹은 내 주변의 여성들이 쇼핑을 별로 안 좋아했기에 개콘에서 종종 사용되던 '여성 쇼핑 중독' 소재도 내겐 전혀 웃기지 않았던 나였다.

근데, 그녀는 왜 토요일 밤 늦게 부피가 큰, 무게도 나가 보이는(직접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찡그린 얼굴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세 개의 쇼핑백을 들고 만원 버스를 탔을까. 고생할걸 뻔히 알면서도 왜?

그녀의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이게 본질적으로 내 잠을 깨운 첫 의문이었다.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그 근거를 나름 추측했다. 위에서도 밝혔듯이, 전부터 내가 가진 오랜 선입견은 "여성들이 쇼핑중독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남성들의 주도하에)가 만들어낸 허상이다"라는 쪽에 가까웠기에, 처음의 추측은 여성편에 서서 자연스럽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1. 이 여성은 오늘 충동구매를 했을 것이다. 오늘 우연치 않게 길을 지나가게 되는데, 평소에 정말 갖고 싶었던 것을 세 개나 보았던 것이다. 이런 우연은 정말로 로또 당첨만큼은 아니여도 정말 가능성 적은 일인데, 오늘 처음으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이 여성은 이런 우연을 버스 안에서 증오하고 있다. '이런 우연은 하루에 한 개만 있었으면' '왜 만원 버스에 탔을까' 혹은 '왜 하필 토요일 저녁에 버스에 사람이 이렇게 많아...' 하고 말이다.

2. 이 여성은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풀 길 좋아하는 여성일 것이다. 오늘 참으로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았다. 아침부터 피부에 화장이 잘 안 받더니, 점심 때는 구두 굽이 빠지는 우여곡절까지 겪었던 것이다. 오후에는 정말 내 스타일 아닌 남자까지 찍쩝거리더니 이런 날은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려야 했던 것이다. 오늘 하루 동안의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버스 위 하루의 마지막까지 낑낑대며 스트레스를 되로 받고 있다.

3. 원래 자기 승용차가 있었는데 고장이 났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수리를 맡기고 이미 쇼핑했던 물건을 들고 어쩔수 없이 버스를 이용한 것이다. 차까지 고장나서 스트레스 받는데, 이 쇼핑한 물건 때문에 버스에서 또 스트레스 받고 있다. 이 여성은 오늘 참 재수 없는 날이라고, 비싼 물건만 아니면 그냥 달리는 버스 창밖에 던져 버렸을 것이라고 산 걸 후회하고 있다.  

4. 남자친구와 함께 쇼핑을 했는데, 남자 친구가 갑자기 급한 볼 일(여자친구 집에도 데려다 줄 수도 없을 만큼 긴박한 일)이 있어서 그 볼 일을 보러 갔다. 여성은 지금 이 남자와 헤어질까 까지도 생각 중이다. 분당까지 가는 1시간 동안의 고생을 최소 1주일간 연락두절로 보답할 거라고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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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름대로 분석해 나가다 보니 한가지 공통분모를 찾았다. 쇼핑은 결국 스트레스로 결부된다는 것이고, 아무리 여성 입장을 이해하고자 해도 (위 추측들은 지극히 여성들의 입장에서 예상한 것들) 여성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만약, 버스를 타지 않고 자가용이 있었더라면 전혀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쇼핑을 한창 할 때는 이렇게 토요일 밤 분당가는 좌석버스안에 사람이 이렇게 많을 것이라는 것, 저녁이 되니 체력이 떨어져 들고 다니는 쇼핑백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 오후부터 신은 하이힐은 시간이 갈수록 무릎과 허리에 통증을 가중시킨다는 것, 낮에 쇼핑백을 들고 다닐 때는 남의 시선을 즐겼는데, 밤이 되니 남의 시선이 두려워진다는 것(소매치기 등 안전 저해요소) 등을 몰랐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알고는 있었는데 쇼핑을 할 때에는 쇼핑에 빠져 이런 것들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또,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쇼핑 중독이 아닐까. 마치, 일인칭 슈팅게임, 즉, 흔히 말하는 총싸움 게임에 푹 빠져 사는 게임중독자가 가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이 여성은 쇼핑을 하는 동안 가상 속에 살았고, 버스에 낑낑대며 올라타 1시간여 서서 가는 동안 고통의 현실을 겪은 것이 아닐까.

나는 여성들이 쇼핑중독이라는 말을 믿지 못했고, 또, 여자친구가 쇼핑을 하는데 몇 시간 동안 졸졸 따라 다녔다는 등 그와 관련된 그 어느 개그 코드도 이해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 내 인식도 바뀌어야 할 때인 것 같다. 간혹, 사소한 일상에서도 이렇게 큰 깨달음을 얻곤 한다. 이 글을 빌어 그 여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ppinggree@londonpointer.com